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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제목 - 몰락의 에티카
저자 - 신형철
출판 - 문학동네
분량 - 721쪽
ISBN- 9788954607315

좋은 글들입니다. 그렇지만.. 좀 어렵습니다. 문학 자체에 많은 관심과 충분히 많은 독서량과 깊이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글들은 충분히 곱씹어서 읽어줘야, 배우는게 많은데 저는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책 분량 자체가 상당히 되고, 저자의 고민 수준까지 제가 접근하지 못하기에.. 순간 순간 직관적으로 인상깊은 글들을 발췌하거나 하는 수준에 그친 듯 합니다.

다만,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점은, 비평이란 영역에 대해 조금은 이해를 넓힐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과, 충분히 좋은 글들이었기에 나중에 다시 한번 맘먹고 읽어보리라는 욕심을 내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글들에서 언급된 많은 작품과 저자들도 접해봐야 하겠다는 점 등입니다.

우리가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어쩌면 그저 느낌이거나 적절한 수준의 감동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넉넉한 읽을 가치가 있다 하겠지만, 그 안에 저자들이 어떤 생각과 관점을 통해서 또는 무엇을 주장하기 위해서 아니면, 주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 글을 쓰게 되었는가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더욱 큰 감흥을 얻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측면에서 비평이란 영역이 존재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즉, 문학을 좀더 많이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영역…

이 글을 저자의 그런 행위와 성과를 모아둔 책입니다. 비평이 올바른지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독자 입장에서, 작가의 글을 둘러싼 많은 사실과 상황과 배경을 제공받음으로써, 또 다른 감동과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덤비기에는 너무 많은 분량과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관계로.. 강하게 추천하기에는 좀 민망합니다. <- 왜냐 하면, 그 만큼 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운 책을 읽고나면, 허탈해지고는 합니다. 한글로 되어 있는, 문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글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모르게 매우 불성실했다는 느낌이랄까 ??


좋은 소설에는 '현실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긴장'이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설명하는 (정치학적, 사회학적) 2차 담론으로 완전히 환원되어 탕진되지 않는다. 그것이 소설의 길이고, 그것이 소설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23~24쪽)

소설과 현실의 관계를 온당하게 살피기 위해서는 소설의 '현실성'을 적어도 세 가지 층위에서 검토해야 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정한 '세계'에서 특정한 '문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해결'을 도모하는 서사 전략이다. 그러니 세계의 현실성, 문제의 현실성, 해결의 현실성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입체적인 시공간에서 특히 의미 있는 한 부분을 도려내어 서사의 무대로 삼을 경우, '세계의 현실성'이 확보되고, 그 세계 안의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고투하면서 당대의 공론장에서 기꺼이 논의해볼 만한 의제를 산출해낼 때 '문제의 현실성'이 확보되며,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심화.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를 제출할 때 '해결의 현실성'이 확보된다. 소설의 현실성은 위의 세 단계에서 따로 또 같이 관철되거나 기각될 수 있다. (24쪽)

간단하게 말해서 욕망의 논리는 "이것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로 규정될 수 있다. 반면 충동의 논리는 "난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하고 있다."가 될 것이다. 한편 환상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난 타자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 (91쪽)

정신분석은 우리에게 사랑이란 대상(object)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어떤 것(object a)'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대상 안에 있는 대상 이상의 어떤 것'이 우리의 환상을 붙들어매고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대상을 욕망하게 한다. 사랑에 관한 모든 담론은 그 '대상 a'를 순화하고 길들여서 상징화하려는 시도이다. (101쪽)

"작가는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소설가 쓰지 히토나리의 매력적인 단언이다. 비어 있는 목적어의 자리에 '윤리'를 넣고 싶다. 윤리란 무엇인가. 윤리는 우선 도덕이 아닌 그 어떤 것이다. 윤리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윤리를 도덕이라는 오염된 문제틀로부터 빼내와야 한다. 도덕은 사회가 나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호명하면서 강제하는 습속에 가깝고, 윤리는 내가 나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명령이라고 칸트에 기대어 말한 것은 가리타니 고진이었다.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규준에 근거하는 강제적 규율이 도덕이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재적 규준에 근거하는 임의적 규율이 윤이라고 스피노자에 기대어 말한 것은 들뢰즈였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우리에게 자유, 선택, 책임의 세계를 열어놓은 것은 (도덕이 아니라) 윤리라는 층위다. 그리고 그것들 없이 주체는 성립될 수 없다. 윤리의 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 어쩌면 주체의 수만큼 많은 윤리학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좋다. 작가는 '에티카(ethica)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로 결정된다. (142~143쪽)

먼저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미리 방어하겠습니다. 제가 하려는 말은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입니다. 전자를 마케팅의 미학, 후자를 전위의 미학이라 명명하겠습니다. 마케팅의 미학은 '새로움은 욕망을 생산하고, 그 욕망은 이윤을 생산하니, 이것은 아름답도다'로 요약됩니다. 아시다시피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전진 동력입니다. 비평이 이 흐름에 동참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움'의 가치는 정확히 '교환가치'일 뿐인데, 오늘날의 문학은 실로 교환가치의 볼모지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문학이 본래 사용가치의 세계일진대, 진정한 비평가라면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쌍수를 드는 우행을 범할 리 없습니다. 저는 뉴웨이브에 대한 관심을 상업주의나 시류추수 등으로 폄하하는 말들을 공허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풍차를 괴물이라 우기는 돌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전위의 미학입니다.
전위의 미학은 정확히 그 반대를 겨냥합니다. 마케팅의 미학이 새로움의 교환가치를 연구한다면 전위의 미학은 새로움의 사용가치를 고민합니다. 사용가치로서의 새로움은 언어의 혁신, 미의식의 갱신, 더 나아가 비평의 쇄신을 도모합니다. 전위는 본질적으로 소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늘날 우리가 뉴웨이브라 칭하는 흐름들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좋음'에 도달하는 다수가 있고 새로운 방식으로 '좋음'에 도달하는 소수가 있을 때, 비평가는 후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 다수는 정답을 재생산합니다. 이때 비평의 언어는 그 정답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존중되어 마땅한 것입니다. 한편 새로운 소수는 질문 자체를 혁신합니다. 그때 비평은 그 혼란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비평 언어들을 혁신할 수 있습니다. (272~273쪽)

그래서 이 '검은' 사내는 '헤어지다'의 주어다. 한사코 제 이름을 '이리(李離)'라고 하겠다질 않는가. ([관계의 사전]) 그러나 헤어짐을 당하는 일과 헤어짐을 만드는 일이 또한 사뭇 다른 것이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감상과 통속에 더러 곁을 내주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기 때문이다. 헤어짐을 '짓는' 일이다. 작별의 안간힘과 준엄함을 노래할 때 그의 시는 가장 아름다워진다. 그는 헤어짐을 지으면서 시를 짓는다. (412쪽)

1973년에 태어났고 1992년에 스무 살이었다. 그 무렵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몰락이 있었다. 그리고 배반의 계절이 왔다. 이미 배반의 계절이었으나 그걸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던 세대가 있었다. 몰락 이후를 살았지만 몰락 이전의 빛이 아직은 남아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죄지은 것도 없이 죄스러웠던 세대, 배반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자신의 배반을 두려워했던 세대, 그러나 내세울 과거가 없었으므로 괴로워할 자격도 없었던 세대였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몸속 낡은 악기에는 먼지만 쌓여갔을 것이다. ([이월]) 우렁찬 소리로 외칠 수 없었지만 골방의 유미주의도 마음 불편했을 것이다. 행복한 호르페우스의 시절은 꽃피기도 전에 끝났다. 노래와 싸우면서 노래해야만 했다. (435쪽)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속도에 탐닉하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다. 빠름은 우리를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데, 두려움의 원천이란 대개 미래에 있기 때문에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두려울 게 없다. 한편, 무언가 잊어버리길 원하는 사람은 그 순간 빨리 걷게 되지만 무언가 떠올리길 원하는 사람은 그 순간 느리게 걷는다. 느림은 우리를 과거의 기억과 만나게 하는 형식이다. 빠름과 느림은 우리가 미래 및 과거와 맺는 관계를 각각 규정한다. (569쪽)

우리는 그의 비평을 읽으면서, 긍정적이되 경박하지 않아야 하고 비판적이되 체념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니 그람시를 바꿔 쓰며 이렇게 결론을 맺자. 당분간 우리게 필요한 것은 현실의 비관주의, 문학의 낙관주의다. (7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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