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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연암을 읽는다 - 박희병

제목 - 연암을 읽는다
저자 - 박희병

출판 - 돌베게
분량 - 461
ISBN- 9788971992371


개인적으로 많이 알고 싶으나, 많이 알지 못하는 위인(?)들 가운데 한 분이 바로 연암입니다.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소설가(문필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일부는 교과서 등에 실려있을만큼 유명하지만, 실은 잘 모르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가장 정통적인 위인들 - 문인이든, 무인이든, 매우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그 일생이 널리 알려진, 심지어 드라마화되기도 하는 - 과는 많이 다른 분이기도 합니다.

열하일기라는 유명한 저서로 널리 알려졌으나, 열하일기 자체를 숙독해본 이는 별로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류의 사람이기도 하구요.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들을 많이 읽어보려고 이런 저런 책들을 섭렵한 후에, 경세유표나 목민심서 - 소위 원전, 물론 적절하게 해석된, 한문이 아닌 - 등의 책을 접근해보려고 하면 5분만에 포기하게 되는 것이 사실 현실이기도 합니다. 100년도 못사는 인생이 넘 무리한다 싶기도 하구요.

간혹, 우리 조상 가운데 위인들에 관심이 가는 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도 다르지 않겠지만, 너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자각에 근거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가 이미 치유되기 어려울 정도로 서양화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근거해 간혹 동양고전이나 전기, 또는 우리 조상의 글들을 읽고자 하는 것은 소심한 반성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연암 박지원 선생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가, 연암의 글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서 낱낱이 살펴주고, 해석을 달고 또한 연암의 인생을 되짚어주며, 연암의 사상과 고민의 일부를 설명해주고 있는 글입니다. 그러기에 우선, 발췌된 원본글을 제시하고, 그 원본글 단락단락을 해석해주는 방식의 마치 참고서같은 유형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암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하다 생각됩니다. 이후에 연암과 관련된 다른 글들을 읽어가기 위한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이 글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연암이 추구한 법고창신론이나, 글에 대한 생각들입니다. 즉, 글을 읽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많은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 상당 부분은 저자의 해석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서도.. - 지금을 사는 제게도 충분히 반성할 수 있는 내용을 제공해준다 하겠습니다. 마구 읽기, 마구 쓰기가 아닌 제대로 읽고, 체화하고, 창조적인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생의 말씀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하겠습니다.


담헌은 음악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과 합일하고 있다. 연암은 '최고의 독서와 최고의 글쓰기는 자연이다'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과 변화, 그 생동감과 생기를 잘 읽어 내어 그것을 글쓰기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 연암 문학의 요체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연암의 글은 설사 자연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글조차도 이런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연암은 문학이란 부단히 자연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127쪽)
학문은 박학이 능사가 아니다. 박학은 학문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조금 박학한 이들은 그것을 뽐내거나 으스대며 마치 대단한 학문을 이루기라고 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실 그것은 잡동사니 지식이든가, 남들의 생각을 이것저것 주워 모아 외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박학자는 대체로 사고의 깊이가 얕거나, 창조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예전의 학자들은 남들이 자신을 '박람강기'博覽强記(이런저런 책을 많이 보고 기억을 잘하는 것)하다고 하는 말을 좋게 생각지 않았다. (163쪽)
모든 글에는 넓은 의미에서 '당파성'이 개입된다. 당파성이 없다고 하는 것도 일종의 당파성이다. 그래서 어떤 글을 읽든 비판적 대면이 요구된다. 이 경우 '비판적'이란 말은 '주체적'이란 말과 관련된다. 주체적이기 위해서는 비판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텍스트에 속고, 텍스트에 투항하게 된다. 텍스트에의 투항은 인식의 해방이 아니라 인식의 마비를 초래하게 마련이다. 텍스트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그에 못지않게 비판 능력 또한 중요하다. 비판 능력에 의해 견제되지 않는 공감 능력은 자폐적이거나 자의적으로 되기 쉽다. (225-226쪽)
사람들은 모두 자기 경지에서 세상을 평가하고 재단한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자기 경지에 갇혀 있으니 그럴 수 밖에. 자신의 경지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은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다. 요즘은 그런 사람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다들 이 글 속의 동자승 같다고나 할까. 깨달은 것도 아니면서 깨달았다고 떠드는 건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실상은 보잘 것 없으면서 겉으로 똑똑한 체 떠들어대는 사람을 '가똑똑이'라고 한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我相이 강한 사람이다. 가똑똑이가 많은 사회는 평화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310쪽)
연암은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공명선이 독서를 잘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통 책을 읽지 않았는데 독서를 잘한 사람이라니! 어째서 이런 역설이 성립될 수 있을까? 독서란 단지 글 뜻만 이해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독서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고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일 터이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독서가 행실을 닦는 것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하였다. 글을 읽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고 자신의 삶은 자신의 삶이고, 이렇게 둘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읽은 글이 자신의 삶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공명선은 3년간 스승을 곁에서 섬기며 그 행실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그러므로 공명선은 비록 책은 하나도 안 읽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독서의 요체를 구현한 셈이다. 연암이 공명선이 독서를 잘한 사람이라고 추켜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334쪽)
문장에 고문古文과 금문今文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이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와 사마천의 글을 본떴다고 해서 우쭐하고 으스대면서 지금 사람을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351쪽)
사실 다독이나 박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독이나 박학을 지향하는 독서는 종종 정심精深한 독서를 발해하며, 잡다한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급급하게 만든다. 이런 독서는 책의 내용을 곱씹어보거나 깊이 음미하는 것이 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주체적인 독서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록 많은 책을 읽어 아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그 지식은 피상적인 게 되기 싶다. 피상적이니 창의성을 낳기도 어렵다. 아는 건 많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얕고 빈약한 것, 이게 바로 다독과 박학을 추구하는 사람이 종종 보여주는 폐단이다. (366쪽)
"자네는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보면 뒤를 못 보고, 왼쪽을 보면 오른쪽을 못 보지. 왜 그런지 아나? 방 안에 앉아 있으나 자기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고 눈과 대상이 너무 가깝기 떄문이지. 그러니 방 바깥으로 나가 문풍지에다 구멍을 뚫어 그리로 들여다보는 게 나은 법일세. 한쪽 눈으로 뚫어져라 보면 방 안의 물건을 낱낱이 볼 수 있으니 말일세." (367쪽)
연암의 답인즉슨, '사물'을 읽으라는 것이다. 사물 고유의 자태, 낱낱의 사물이 보여주는 개성과 살아 있는 몸짓을 읽으라는 것이다. 요컨대 형해화된 문자나 글 속에 갇히지 말고 그 밖으로 나가 사물 및 세계와 만남으로써 형해화된 문자를 되살려 내라는 것이다. 연암은 사물에 대한 관찰, 즉 사물에 대한 읽기를 통해 사물이 지닌 구체성, 그 생동하는 자태를 문자와 글 속으로 다시 끌고 들어옴으로써 그것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이얷은 결국 상상력과 감수성의 해방으로 연결된다. 요컨대 연암은 남의 글에서 상상상력을 배우려 들지 말고, 사물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상상력과 감수성을 쇄신하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점에서 글읽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글은 궁극적으로는 글쓰기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만하다. 사물을 잘 관찰하는 것이 훌륭한 독서이고, 훌륭한 독서가 되어야 창조적인 글쓰기가 가능해짐으로써다. (435쪽)


이외에도 선생은, 벗과의 우정을 수없이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사랑하는 이들 - 형제, 가족, 친구 등등 - 과의 관계에서 따뜻한 서정성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오히려 매우 의존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아래와 같이 서정적인 글들에서는 선생의 해학적이거나 비판적인 글들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합니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해도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이 외배 지금 가면 어느 때 돌아올 꼬?
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27쪽)


어쨌거나, 기회가 닿는다면 선생의 다른 글들을 한번쯤 읽어볼까 합니다. 너무 겉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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