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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공무도하 -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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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공무도하
저자 - 김훈

출판 - 문학동네
분량 - P325
ISBN- 978895460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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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09년 말에 읽은 책인데.. 이제서야 소감을 정리합니다. 몇 안되는 국내 인기작가 중의 하나인 김훈씨가 쓴 책이고, 제법 많이 팔렸을테니.. 나름 유명한 책이다. 사실, 저자의 작품을 몇개 읽어보았지만, 다른 소설가와는 달리 읽고나서 어떤 명확한 느낌이라는게 남지 않는다. 그저 읽어내렸다는 정도의 생각이다. 아마도 저자의 글들의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매우 특출나거나 영웅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그저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성격과 상황을 가진 이들로 구성된 이야기들이랄까 ?

역시 이 책에 나오는 몇몇 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히스토리를 갖고는 있지만, 누구의 히스토리가 하나가 책 전반을 아우르거나 좌우하지 않기 때문에, 읽고나서 어딘가 뚜렷하게 남지 않는 것이다 싶다. 그저 읽었던 내용들 가운데, 순간 순간 감회가 스칠 뿐이랄까 ?

아래 내용은 사실 제법 긴데..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고.. 새삼 라면과 파와 달걀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이었기에 수고스럽지만 그대로 옮겨봤다. 늦은 저녁 라면 한 그릇을 사이에 둔 두 등장인물의 대화와, 그리고 그 내용이 참 좋다. 라면 생각 난다.

노목희가 끓는 물에 라면 한 개를 넣었다. 문정수는 식탁에 앉아서 한국어판 [시간 너머로]의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싱크대 쪽으로 돌아선 노목희는 원피스 잠옷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 위에서 빛들이 쏟아져 내렸고, 머리가 움직일 때 머리카락 밑에서 어둠이 배어나왔다. 다시 머리가 움직이면 배어나온 어둠이 부서지면서 빛으로 흘러내렸다. 빛이 머리카락 밑으로 스며서 어둠과 섞이면 어둠의 입자들이 머라키락 사이에서 빛으로 솟았다.
- 파 사왔지?
문정수가 비닐봉지에서 대파 한 단을 꺼내 노목희에게 내밀었다. 아파트 입구 24시 식료품가게에서 사온 대파였다. 노목희가 싱크대 족으로 돌아선 채 말했다.
- 굵구나. 파는 희고 굵은 게 맛있어. 힌 밑동이 시원해.
문정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 그런 걸 아니?
- 그럼, 알지. 파는 원산지가 파미르 고원이래. 인도, 아프가니스탄 접경 카라코람 산맥 속의 산악지대야. 둔황 서쪽 8천리,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설산고원.
- 멀리서 온 풀이구나.
노목희가 돌아선 채 또 말했다.
- 파를 한자로 총悤이라고 하잖아. 파미르 고원이 한자로 총령悤嶺인데, 파가 많은 고원이라는 뜻이래. 여름엔 지평선 가득히 하얀 파꽃이 핀대. 저녁엔 노을이 내려서 파꽃 핀 고원이 붉어진다는 거야.
문정수가 [시간 너머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 그래? 이 책 속에 씌어 있니?
- 음, 그 사람도 거기를 자동차로 넘어왔지. 신라 때 혜초는 걸어서 넘었대, 혜초가 갔을 때는 사람은 안 살고 파만 널려 있었대. 겨울에도 눈 속에서 파싹이 올라온다는군.
- 그래서 겨울 파가 더 달고 시원하구나. 고생을 많이 해서......
노목희가 돌아선 채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빛들이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노목희가 냄비 뚜껑을 열고 끓기 시작한 라면을 저었다.
- 아마 그럴 테지...... 고생을 해서......
- 라면 물 졸겠다.
- 보고 있어.
노목희가 대파를 썰어서 냄비에 넣었다. 파가 끓는 국물에 잠기면서 김 속에서 단내가 풍겼다. 노목희는 레인지 불을 끄고, 달걀을 풀어넣었다. 냄비 속에 남은 잔열에 달걀이 익었다. 달걀은 반쯤 익으면서 국물 속으로 풀어졌다. 달걀이 풀어지자 대파가 익는 단내가 부드러워졌고 파의 날카로움이 숨을 죽였다.
노목희가 라면 한 개를 두 그릇에 나누어 펐다. 김이 피어오르고, 냄새가 방 안에 찼다. 대파와 달걀이 국물 속에서 익어가면서 서로 스민 냄새였다. 문정수가 비닐봉지에서 김밥과 겉절이김치를 꺼내 식탁 위에 놓았다. 경찰서 구내식당에서 김밥을 살 때 얻어온 김치였다. 노목희가 말했다.
- 파를 많이 넣어서 좀 달 거야.
문정수가 라면을 후루룩 빨아당겼다.
- 라면이란......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옥죄었다. 라면을 삼키고 나서 문정수는 말을 이었다.
- ...... 참 좋구나.
노목희가 젓가락을 들면서 웃었다.
- 말이 좀 어렵네. 중 같아. 다 산 노인 같기도 하고. 말이 너무 쉬워서 그런가.
문정수는 김밥을 라면 국물에 적셨다. 문정수가 말했다.
- 밤중엔 냄새에 밀도가 높아지는 건가. 공기가 더 촘촘해지는 건가? 아니면 더 헐거워져서 그런가?
- 그게 무슨 말이야?
- 라면 냄새가 좋아서. 밤이라서 그런가?
노목희가 웃었다.
- 야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럴 거야. 밤공기에 민감해져서. 피곤하고 배가 고프면 후각이 예민해지거든.
- 파를 넣어서 국물이 시원해.
- 파 건더기는 먹지 마.
- 흰 건 먹어도 되잖아.
- 파란 잎은 건져내.
- 혜초도 파미르 고원에서 파를 먹었을까?
- 먹었겠지. 라면은 없었겠지만, 푸성귀는 있었을 거야.
- 파를 어떻게 먹었을까? 이 책에 안 나와?
- 글쎄, 무슨 조리법이 있었겠지.
- 맛이 지금이랑 같았을까?
- 같다고 봐야지. 파 맛이 달라졌겠어?
- 기막히구나, 기막혀 파 맛에 비하면 [시간 너머로]도 별 거 아니네.
- 그런데 혜초는 그 먼 데를 왜 갔다는 거야? 파 먹으로 갔나? 타이웨이는 혜초에 대해서 뭐라고 썼어?
- 혜초도 시간 너머로 가고 싶었겠지. 공간과 시간을 함께 넘어가려 했을 거야.
- 그랬을까? 하여튼 설산고원 땅에서 갓 뽑은 파는 맛있었겠지.
- 그런데 우리 지금 밤중에 라면 먹으면서 왜 이런 얘기 하는 거야? 이게 얘기가 되는 거야?
- 파 때문에 이렇게 됐어. 요 앞에서 사온 파 때문에.
- 먹어. 라면 불겠다.
노목희가 젖가락으로 겉절이김치를 집어들었다. 배추가 너무 커서 한 입에 넣을 수 없었다. 문정수가 젖가락을 뻗어서 김치를 잡았다. 문정수의 젖가락과 노목희의 젖가락이 배추 안 조각을 맞잡고 세로로 찢었다. 찢어진 김치를 각자 라면 위에 얹어서 먹었다. 문정수는 그릇을 들어서 국물을 마시고 입을 휴지로 닦았다.
- 국물이 달구나.
- 달걀을 풀어야 해. 파만 넣으면 단맛이 뒤가 날카로워.
- 달걀을 넣으면 어떤데?
- 달걀이 들어가면 날카로운 게 포근해져. 둥글어지지.
- 그래? 거참......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맛이 둥글다.
- 파는 달결과 잘 어울려. 뜨거운 국물 속에서 달걀이 파맛을 끌어당겨서 달래는 것 같아.
- 넌 국물 속 일을 알 수가 있니?
노목희가 젖가락을 내려놓고 웃었다.
- 끓는 냄새를 맡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과히 틀리지는 않을 거야.
- 니 말이 맞는 것도 같어.
- 그러니까 파를 먼저 넣어야 해. 파를 먼저 끓여서 날카로운 맛이 국물 속으로 배어나온 후에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파를 달래서 맛을 둥글게 해주는 거지.
- 그렇겠구나. 그걸 다 냄새로 아는 거야?
- 끓는 걸 봐도 알 수 있잖아. 먹어봐도 알 수 있고.
- 그런데, 혜초는 달걀이 없어서 파만 먹었겠네.
- 또 파미르 고원 얘기야? 이 밤중에.
(중략) (p210-216)

젖가락으로 김치를 마주 잡고 찢어 먹는 하찮음이 쌓여서 생활을 이루는 것인가. 그 하찮음의 바탕 위에서만 생활은 영위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소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의의 들판으로 생활은 전개되는 것인가. 그 사소함이 견딜 수 없이 안스럽고 그 적의가 두려워서 나는 생활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이렇게 쭈빗 거리고 있는 것일까...... (p218)


그저 읽어내릴 수 있는 글이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중간 중간 인터럽트가 걸리거나, 어딘가 장애물을 만나는 것도 어찌 보면 부담이라면 부담이니까...

(사실 이 책을 처음 집어들었때는 고조선 시대의 이야기인가 싶었다.. 쪽팔리게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