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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나무야 나무야 -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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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무야 나무야
저자 - 신영복

출판 - 돌베게
분량 - 160P

ISBN-
9788971990933

후우... 늘 저자 신영복씨(존칭을 감히 생략해 봅니다.)의 글을 마주하면, 반성이 먼저 앞서게 된다. 글귀 하나 하나에서 선생님의 고뇌와 사색이 옅보이며, 같은 현상을 보고도 이렇게 깊은 고민의 결과가 아주 쉬운 문장으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 감동스럽다.

그래서일까, 읽다가 다시 앞장으로 넘기고, 또 읽다가 혹시나 놓친 것은 없는지 자꾸 되짚어 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나만의 느낌이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은 신영복씨가 출옥한 이후에 반도 남쪽 곳곳을 다니는 가운데 생각나는 여러가지 글들을 차분하게 아주 차부하게 또 아주 부드러운 하지만 심지가 굳은 글로 표현해내고 있다.

다소간 어려운 측면도 있고, 다소간 낯선 한자와 글들이 없지는 않으나, 전체 글의 느낌과 저자의 사색을 읽어내는 데에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그 저자의 사색이 보여지는 곳곳마다, 나 자신과 비교하게 되고, 후회하게 되고, 반성하게 됨을 부끄러워 할 뿐이다.

사람의 관계, 아래로의 지향을 늘 느낄 수 있는 선생의 글들은 언제 읽어도 가슴에 울리는 느낌이 크다. 몇권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그 감동이 사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글의 실체인 저자의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읽는이 스스로 부끄러울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또 인정하면서, 몇몇 생각나는 글귀들을 정리해봅니다.


p22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의 창출 그 자체는 잠재적 역량의 계발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p29
언젠가 붓글씨로 써드렸던 글귀를 엽서 끝에 적습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p47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이기 때문입니다. 역경(易經) 64괘는 미완의 괘인 '미제'(未濟) 괘로 끝나고 있습니다. 괘사(卦辭)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우가 시내를 거의 다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p50
강화학이 비록 봉건적 신분질서와 중세의 사회의식을 뛰어넘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지식인의 자세를 준엄하게 견지하며 인간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가장 실천적으로 고민하였던 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곤륜산을 타고 흘러내린 차가운 물 사태(沙汰)가 사막 한가운데인
염택(鹽澤)에서 지하로 자취를 감추고 지하로 잠류하기 또 몇 천리,
청해에 이르러 그 모습을 다시 지표로 드러내서 장장 8,800리 황하를 이룬다.

p52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p58
기쁨과 아픔, 환희와 비탄은 하나의 창문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인지도 모릅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지혜는 당신의 말처럼 '결합의 방법'입니다. 선량하나 나약하지 않고 냉철하나 비정하지 않고 치열하나 오만하지 않을 수 있는 '결합의 지혜', '결합의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p61
그러나 오늘 북한산에서 느끼는 생각은 참으로 침울합니다.
산천이 '몸'이고 그 위에 이룩된 문명이 '정신'이라는 당신의 말을 생각하면 지금의 서울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처난 몸이 거대한 머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가슴'과 '머리'의 조화라고 하였습니다.
따뜻한 가슴(warm heart)과 냉철한 이성(cool head)이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사람은 비로소 개인적으로 '사람'이 되고 사회적으로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사랑'과 '이성'(理性)의 인간학이고 사회학입니다. 사랑이 없는 이성은 비정한 것이 되고 이성이 없는 사랑은 몽매(夢昧)와 탐닉(耽溺)이 됩니다.

p99
"사람들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우상(偶像)은 사람들을 격려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抑壓)이다."
천재와 위인(偉人)을 부정하는 당신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광화문의 동상 속에 충무공이 없다는 당신의 말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는 사람이며, 가장 현명한 사람이란 가장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109
경(敬)과 의(義)를 근간으로 하는 학문의 대도(大道)는 그것만으로도 어떠한 현실정치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더 오랜 생명력으로 사회를 지탱할 수 있고 또 지탱하여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그는 갖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높이 빼어나지는 않되 흡사 산맥 속에 묻힌 숯처럼 역사의 동력을 갈무리하는 중후한 무게를 그는 재야라는 공간에서 이루어내었던 것입니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들을 질타하였습니다.

p116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를 때를 일컬어 우리는 그것을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p146
세번째로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술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반성입니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반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나는 익어나오는 도자기를 한 줄로 늘어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가차없이 깨트리는 행위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엄정한 작가정신이라고 하기에는 자연과 예술에 대한 이해가 협소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조선조 초기에도 가마에서 나오는 완성품을 놓고 깨트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감별하는 파기장(파기장)이란 직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관청의 소용이라는 실용적이고 기술적인 기준에서 요구되었던 것일 뿐 엄격한 예술적 재단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망치를 들고 깨트리는 이른바 작가정신을 당신은 예술에 대한 오해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태도는 자기의 감각에 탐닉하는 것이며 예술이나 작가정신이라는 분식(粉飾) 속에 감추어진 오만이고 유희인지도 모릅니다.

p156
당신의 말처럼 이제 더 이상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물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바다가 됩니다. 달려야 할 목표가 없다기보다는 달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은 부질없었던 강물의 시절을 뉘우치는 각성의 자리이면서 이제는 드넓은 바다를 향하여 시야를 열어나가는 조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강물의 치열함도 사실은 강물의 본성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험준한 계곡과 가파은 땅으로 인하여 그렇게 달려왔을 뿐입니다. 강물의 본성은 오히려 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는 겸손과 평화인지도 모릅니다.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본성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며 가장 평화로운 물이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가장 낮은 물이고 평화로운 물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늘로 오르는 도약의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목표를 회복하고 청천하늘의 흰구름으로 승화하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방법으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최후의 목표로서의 평화입니다.



읽는 것보다, 내 태도와 자세와 삶에 견주어 부끄러워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