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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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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 - 신영복

출판 - 돌베게
분량 - 399P

ISBN-
8971991062

이제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출간된지도 벌써 20년이 넘었고, 이 책에 쓰인 글을 그로부터 다시 20년전의 글들부터 존재한다. 저자의 다른 몇 권의 책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 언젠가는 아마도 읽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

항상 어떤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것인지, 아니면 읽기는 해야 하는데, 선뜻 자신을 갖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나 스스로가 부끄럽기에 감히 책을 잡지 못한 것은 아닌지.. 등등..

다만, 이 책을 다 읽고나서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아마도 더 젊었던 시절에 읽었더라면, 이 책에 언급된 수많은 내용들을 이해하는 데에 분명 지금보다 많은 한계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야 읽을 수 있었기에 어쩌면 좀더 여유롭게 아니 좀더 넓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자평을 해본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히 이 책에 대해서, 그 내용에 대해서 가타부타 평할 자신과 자격을 먼저 의심하게 된다. 그저 저자의 사색을 가급적 많이 아니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볼 뿐이다. 저자의 글 한 줄 한 줄에 스며있는 고뇌와 깊은 생각들에 깊은 존경을 보낸다.

앞으로도 더 많은 글들을 접할 수 있기를, 그리고 더 많은 글들을 쓰실 수 있기만을 기대한다..

무수히 많은 글과 내용들을 마음에 새겨야 하고, 또 실천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게으름과 사고의 한계에 아래 정도의 글들만 옮겨본다.

p24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p27
사회란 '모두살이'라고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p59
불모의 영토마다 자리잡고 있는 과거라는 이름의 숲은 실상 한없이 목마른 것입니다. 그늘도, 샘물도, 기대앉을 따뜻한 바위도 없습니다. 머물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나는 벽 앞에 정좌하여 동공을 나의 내부로 열기로 하였습니다. 내부란 과거와 미래의 중간입니다. 과거를 미화하기도 하고, 현재를 자위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색이 머리 속의 관념으로서만 시종(始終)하는 것이고 보면, 앞뒤도 없고 선후도 없어 전체적으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의 내부에 한 그루 나무를 키우려 합니다. 숲이 아님은 물론이고, 정정한 상록수가 못됨도 사실입니다. 비옥한 토양도 못되고 거두어줄 손길도 창백합니다. 염천과 폭우, 엄동한설을 어떻게 견뎌나갈지 아직은 걱정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이 나무는 나의 내부에 심은 나무이지만 언젠가는 나의 가슴을 헤치고 외부를 향하여 가지 뻗어야 할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과거에다 심은 나무이지만 미래를 향하여 뻗어가야 할 나무입니다. 더구나 나는 이 나무에 많은 약속을 해두고 있으며 그 약속을 지킬 열매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 아프더라도 자위보다는 엄한 자기 성찰로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p65
그러나 나는 인간을 어떤 기성(旣成)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이 이룩해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듯이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간관계는 상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일종의 동태관계(動態關係)인 만큼 이제부터는 그것의 순화를 위하여 네 쪽에서 긍정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

p77
하나의 역사적 사실은(인물의 경우도 포함하여) 그것만을 따로 떼어 고립적으로 인식할 때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하한 경우라 할지라도 (1) 어떠한 계기에서 발생하였으며 (2)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다가 (3) 어떠한 방향으로 발전해갔는가 하는 역사적 관계 내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을 당시의 사회구조, 당시의 가치 규준에 조응시켜 당시의 사회구조가 갖는 필연적 한계를 늘 그것의 인식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p85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p101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폭의 글은, 획, 자, 행, 연 들이 대소, 강약, 태세(太細), 지속(?速), 농담(濃淡)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 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질’(質)이 가능할 것입니다.

p102
[맹자]는 정독해 보려고 합니다. [논어]보다 장문이라 문리(文理)를 틔우는 데는 더 낫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고전 해독에 우선 한자의 어휘가 달리기도 합니다만 자훈(字訓)의 다기(多岐)함에 더 애를 먹습니다. 물론 독해의 절대량이 많아지면 지금 느끼고 있는 애로들 중의 상당한 부분이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저 우직하게 외곬으로 읽어나가는 것만 못한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무슨 편법이나 첩경이 없나 자주 살피게 됩니다. 이것은 관심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p125
여지인 야반생기자 거취화이시지 급급연 유공기사기야

?之人 夜半生其子 遽取火而視之 汲汲然 惟恐其似己也
(언청이가 밤중에 그 자식을 낳고서는 급히 불을 들어 비춰보았다. 서두른 까닭인즉 행여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장자](莊子)에서 읽은 글입니다.
비통하리만큼 엄정한 자기 응시, 이것은 그대로 하나의 큼직한 양심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봅니다.

p135
목적과 수단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하고, 목적에 이르는 첩경이나 능률적인 방편을 찾기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높은 벼랑일지라도 마주 대하고 서는 그 대결의 의지는 그 막힌 듯한 우직함이 벌써 하나의 훌륭한 건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 지족과 평정을 얻기 위하여 다름아닌 지족과 평정을 닦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굵고 큼직한 사고야말로 그 속에 가장 견고한 건강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듯합니다. 보시선행 사무사(布施善行 思無邪)를 가르치는 현묵자의 양생법은 그 자체로써 하나의 엄한 인간교육임을 알겠습니다.

p139
대개의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거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枝葉末端)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敎條)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분서(焚書)를 욕할 수만도 없습니다. (중략)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外界)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 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고 믿습니다.

p151
행복동의 영희가 최후의 시장에서 사온 줄 끊어진 기타를 치면서 머리에 꽂았던 팬지꽃. 화단의 맨 앞줄에나 앉는 키 작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꽃이지만, 열두 시의 날개가 조용히 열려 수평이 되듯이, 팬지꽃이 그 작은 꽃봉지를 열어 벌써 여남은 개째의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한 줌도 채 못되는 흙 속의 어디에 그처럼 빛나는 꽃의 양식이 들어 있는지……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 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

p155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맹자]의 일절이 상기됩니다.

시인유공불상인 함인유공상인 무장역연 고술불가불신야
矢人惟恐不傷人 函人惟恐傷人 巫匠亦然 故術不可不愼也
(활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방패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두려워한다.)

스스로 시대의 복판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시대와 역사의 대하로 향하는 어느 가난한 골목에 서기를 주저해서도 안되리라 믿습니다.

p163
사다리를 올라가 높은 곳에서 일할 때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글씨가 바른지 삐뚤어졌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코끼리 앞에 선 장님의 막연함 같은 것입니다. 저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물어봄으로써 겨우 바른 글씨를 쓸 수 있었습니다.

p169
손가락을 베이면 그 상처의 통증으로 하여 다친 손가락이 각성되고 보호된다는 그 아픔의 참뜻을 모르지 않으면서, 성급한 충동보다는, 한 번의 용맹보다는, 결과로서 수용되는 지혜보다는, 면면(綿綿)한 기도(企圖)가, 매일매일의 약속이, 과정에 널린 우직한 아픔이 우리의 깊은 내면을, 우리의 높은 정신을 이룩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스스로 충동에 능하고, 우연에 승하고, 아픔에 겨워하며 매양 매듭 고운 손 수월한 안거(安居)에 연연한 채 한 마리 미운 오리새끼로 자신을 한정해오지나 않았는지…..

p174
연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挻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 경우, 그릇으로서의 쓰임새는 그릇 가운데를 비움으로써 생긴다.
‘없음’(無)으로써 ‘쓰임’(用)으로 삼는 지혜, 그 여백있는 생각, 그 유원(幽遠)한 경지가 부럽습니다.

p180
더 좋은 잔디를 찾다가 결국 어디에도 앉지 못하고 마는 역마(驛馬)의 유량도 그것을 미덕이라 할 수 없지만 나는 아직은 달팽이의 보수(保守)와 칩거(蟄居)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마살에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는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며 바다로 나와버린 물은 골짜기의 시절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옷자락을 적셔 유리창을 닦고 마음속에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를 비워두는 준비가 곧 자기를 키워나가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p188
몸 가까이 있는 잡다한 현실을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올바로 이론화해내는 역량은 역시 책 속에서는 적은 분량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派黨性)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p191
“우차(牛車)가 나아가지 않으면 소를 때리겠느냐 바퀴를 때리겠느냐?”는 우문(愚問)이 때로는 선후를 그르치는 것은 거개가 졸속한 욕심에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p194
이번 이사 때 가장 두고 오기 아까웠던 것은 ‘창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오뉴월 보리밭 언덕이 내다보이는 창은 우리들의 메마른 시선을 적셔주는 맑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着目)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陽地)’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進步)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213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p229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老)가 원숙이, ‘소’(少)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年月)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p236
나는 십수년의 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경향의 틈새에서 여러 형태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경험해왔음이 사실입니다. 복잡한 표현과 관념적 사고를 내심 즐기며, 그것이 상위의 것이라 여기던 오만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조야한 비어를 배우고 주워섬김으로써 마치 군중관점을 얻은 듯, 자신의 관념성을 개조한 듯 착각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쪽을 절충하여 ‘중간은 정당하다’는 논리 속에 한동안 안주하다가 중간은 ‘가공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임을 소스라쳐 깨닫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믈론 어느 개인이 자기의 언어를 얻고, 자기의 작풍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방황과 표류의 역정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방황 그 자체가 이것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 아니며, 방황의 길이가 성취의 높이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어딘가의 ‘땅’에 자신을 세우고 뿌리내림으로써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p247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亘)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p260
유배지의 정다산(丁茶山)을 쓴 글을 읽었습니다. 이조를 통틀어 대부분의 유배자들이 배소(配所)에서 망경대(望京臺)나 연북정(戀北亭) 따위를 지어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연모를 표시했음에 비하여 다산은 그런 정자를 짓지도 않았거니와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해 해배(解配)만을 기다리는 삶의 피동성과 그 피동성이 결과하는 무서운 노쇠(老衰)를 일찍부터 경계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농민의 참담한 현실을 자신의 삶으로 안아들이는 애정과 능동성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이조의 묵은 사변(思辨)에 신신(新新)한 목민(牧民)의 실학(實學)을 심을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다산의 이러한 애정과 의지는 1800년 그가 39세로 유배되던 때부터 1818년 57세의 고령으로 해배될 때까지의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으며 마침내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500권의 저술을 비롯하여 실학의 근간을 이룬 사색의 온축(蘊蓄)을 이룩하였습니다. 물론, 다산학(茶山學)과 실학에 대해서는 일정한 한계와 편향이 없지 않음이 지적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를테면 이조 후기, 봉건적 지배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농민들이 그 거칠고 적나라한 저항의 모습을 역사의 무대에 드러내는 이른바 ‘민강(民强)의 시대’에, 봉건질서의 청산이 아닌 그것의 보정(補整).개량이라는 구궤(舊軌)를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목’(牧)자에 담긴 관학적(官學的) 인상(印象)과 ‘심’(心)자에서 풍기는 그 관념성 역시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산 개인의 한계로서가 아니라 다산이 살던 그 시대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구나, 나아가 벼슬자리에 오르면 왕권주의자가 되고 물러나 강호(江湖)에 처하면 자연주의자가 되기 일쑤인 모든 봉건 지성의 시녀성과 기회주의를 둘 다 시원히 벗어던지고, 갖가지의 수탈장치 밑에서 허덕이는 농민의 현실 속에 내려선 다산의 생애와 사상은 분명, 새 세기의 새로운 양식의 지성에 대한 값진 전범(典範)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p277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 > 인식 > 재실천 > 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p286
소혹성에서 온 어린 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합니다. 관계를 맺음이 없이 길들이는 것이나 불평등한 관계 밑에서 길들여진 모든 것은, 본질에 있어서 억압입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 개의 나무의자든, 높은 정신적 가치든, 무엇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은 창문 앞에 서는 공감을 의미하며,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p293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민중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교(假橋)가 되어주지도 않습니다. 민중을 불우한 존재로 선험(先驗)하려는 데에 바로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당대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基底)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입니다. 어떠한 시냇물을 따라서도 우리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듯이 아무리 작고 외로운 골목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민중의 뿌리가 뻗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부족한 것은 당사자들의 투철한 시대정신과 유연한 예술성입니다.
그 허상의 주변을 서성이며 민중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실패가 설령 그들 각인의 의식과 역량의 부족에 연유된 것이라 할지라도, 저는 그들 개인의 한계에 앞서 우리 시대, 우리 사회 자체의 역사적 미숙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인식과 역량은 기본적으로는 사회적 획득물이기 때문입니다.

p298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이라고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p313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p334
왜냐하면 작은 실패가 있는 쪽이 없는 쪽보다 길게 보아 나은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실패가 있음으로 해서 전체의 국면은 ‘완결’이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이 미완은 더 높은 단계를 향한 새로운 출발이 되어줍니다. 더구나 작은 실패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과 사물을 돌이켜보게 해줍니다.

p337
천문학에 광년(光年)이란 단위가 있듯이 세상에는 1년 단위의 세모보다 훨씬 긴 무슨 단위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허리띠 끌러놓고 이른바 역사를 상대하여 앉아 있는 그런 넉넉하고 우둔한(?) 마음이라면 세월을 잘게 잘게 토막내서 수많은 최후들을 만들어내려 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먼 곳 없이 어찌 넓을 수 있으며 기다림 없이 풀 한 포긴들 제 형상을 키울 수 있으랴 싶습니다.

p352
가운데 씨가 박혀서 좀처럼 쪼개질 것 같지 않은 복숭아도 열 손가락 잘 정돈해서 갈라쥐고 단호하게 힘을 주면 짝 하고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지면서 가슴을 내보입니다.
‘하------트’
복판에 도인(桃仁)을 안은 ‘사랑의 마크’가 선명합니다.
사랑은 나누는 것.
복숭아를 나누고, 부채바람을 나누고, 접견물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p392
그 많은 싸움들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누어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책(上策)은 못되고 중책(中策)에 속합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패배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마음이 유(柔)해야 하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경우에 어긋남이 없고 떳떳하기만 하면 조급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도 없고, 옆에서 보는 사람은 물론 이긴 듯 의기양양하던 당사자까지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것도 싸우지 않는 것만은 못합니다.
싸움은 첫째 싸우지 않는 것(無爭)이 상지상책(上之上策)입니다. 그 다음이 잘 지는 것(易敗), 그 다음이 작은 싸움(靜爭), 그리고 이기든 지든 큰싸움은 하책(下策)에 속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고 정독하고 정독하라..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