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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자료실에서 눈길이 가길래 그냥 집어서 읽기 시작한 책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매우 흥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이 책은 문학과 관련된 책일까 ? 아니면 철학과 관련된 책일까 ? 저자가 소재로 삼고 있는 것들은 거의 모두 문학서적이다. 그 중에서도 소설이나 희곡류이며, 매우 유명한 책들이다.
저자는 각각의 소설들을 대상으로 작가의 살았던 시대나 환경, 당시의 분위기, 왜 그 작가가 그런 책을 쓰게되었을까라는 것들과 함께, 각 책에 나오는 스토리와 인물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결국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으로 끌어내고 있다. 예를들어, 선과 악, 신앙, 유토피아, 기억, 회상, 권태, 가정, 일상과 같은 키워드들로부터 말이다.
이런 접근이 매우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책들을 다시한번 돌아보게끔 자극을 제공한다.
이 책에 언급된 문학서적이란 것들은 그 작가와 제목만 들어도 충분히 알만한 것들이다.
파우스트 - 괴테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어린 왕자 - 생텍쥐베리 오셀로 - 셰익스피어 변신 - 프란츠 카프카 구토 - 사르트르 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게트 페스트 - 알베르 카뮈 광장 - 최인훈 당신들의 천국 - 이청준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1984년 - 조지 오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마르셀 푸르스트
위 책들을 각각 언급하기도 하지만, 각 주제별로 다른 작가나 철학자의 입장, 국내 작가나 소설 들도 매우 폭넓게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편향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며, 다만 왜 그 시기에 그런 책이 나왔고, 아떤 사조(ism)에 물려 있으며, 그 사조는 어떤 근거나, 역사와 내용을 담고 있느나를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많이 들어왔던, 낭만주의, 계몽주의, 리얼리즘, 자연주의, 실존주의는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 물론 읽고 나면 까먹기는 한다.
또 하나 느끼게 되는 점은, 소개된 책들이 매우 유명한 책들이고, 일부는 책꽂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다 읽은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사실 좀 허탈해졌다. 과연 나는 무엇을 읽어왔던 것일까 ? 그러면서 짬을 억지로 내서라도 고전을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저자의 다른 서적도 좀 봐야겠다는 소심한 생각을 좀 해보기는 했다.
무한한 자기 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이다. - 키르케고르 (p32)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낭만주의에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수동적 또는 해체적 성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낭만주의는 계몽주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추상적 개인(Man)'을 발견했지요. 그럼으로써 자기실현이라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20세기 전반을 휩쓸었던 실존주의라는 후계자를 낳은 거지요. 신학자 파울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가 [존재에의 용기]에서 적절히 표현한 것처럼, 낭만주의와 실존주의는 모두, 인간이 진리도 신도 없는 공허한 세계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려는 용기'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p49)
그 결과 현대인들은 이제 예컨대 '나는 이가 아프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치통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나아가 '사랑한다', '원한다', '미워한다'와 같은 동사적 표현들을 '사랑을 갖고 있다'. '소망을 갖고 있다', '증오를 갖고 있다'와 같이 소유를 나타내는 명사적 표현들로 바꾸어 표현한다는 거지요. 프롬은 통증, 사랑, 소망, 증오처럼, 소유할 수 없는 정신적인 대상까지 소유의 대상인 것처럼 하나의 물건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언어 습관에서 소유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병리적 집착을 보았던 겁니다. (p113)
얼핏 보아 휴머니스트이자 지식을 추구하는 '독서광'은 이렇게 교육받은 대중적 소시민의 상징입니다. 지식욕이 강한 그는 백과사전을 순서대로 흝어가며, 유명한 학자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첩에 적어놓지요. 로캉탱이 보기에 '독서광'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보다는 타인의 지식에 더 신빙성을 두어, 무비판적으로 기존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타인이 축적한 지식에서 찾는 것이기에 무의미하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독서광'은 비록 지식인이지만 여분의 존재라는 겁니다 (p150)
자신의 힘을 다하여 생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의미 있는 삶을 제외하면 삶에는 의미가 없다. - 에리히 프롬 (p161)
1939년 9월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은 로츠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을 4평발킬로미터 넓이의 거주지역에 몰아넣고,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시킵니다. 신문, 책, 라디오, 심지어는 시계마저도 압수하고 재산권 행사도 금지했지요. 그러니 아무런 희망도 보람도 없이 아우슈비츠나 헤우무노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단지 독일이 꿈꾸는 제3제국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예로 봉사해야만 하는 거주지역 유대인들의 삶은 '시지프의 형벌' 처럼 고통스럽고 무의미했지요. 그들은 나치 독일군이 만든 인위적 사막에 갇힌 것입니다.
그들 중 야콥 하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령부 주위에서 우연히 러시아 군대가 400킬로미터 밖 인근까지 진격해왔다는 뉴스를 듣게 되지요. 그리고 생각합니다. "기대를 걸 만하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희망을 버린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내게 라디오가 한 대 있다."라고 거짓말을 하지요.
이 말이 퍼지면서 동료들이 그의 주의로 몰려들고, 그는 매일 매일 거짓 뉴스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다 스스로 불안해진 야콥이 어느 때 한 친구에게 조심스럽게 사실을 털어놓지요. 자신은 라디오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대로 사람들이 자기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친구가 자살하지요. 그러자 야콥은 자신이 하는 1그램의 거짓말이 1톤의 희망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동료들이 사막에서 자살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건너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p208~209)
문제는 누군가가 스스로 진리를 이미 자기 손에 쥐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는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최종적이고 완전한 진리라고 믿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p251)
포퍼는 1947년 7월 브뤼셀 예술원에서 '유토피아와 폭력'이라는 제목으로 한 연설에서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어떠하든 그것을 논의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우리 각자가 자기만 옳다고 주장할 때보다 더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p252)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하라. 정치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행복을 달성하려고 하지 말아라. 오히려 구체적인 불행을 없애려고 노력하여라. - 칼 포퍼 (p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