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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로쟈의 인문학 서재 - 이현우

제목 - 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 이현우

출판 - 산책자
분량 - 427
ISBN- 9788901095714


아마도 작년에 좋은 책으로 선정된 것으로 기억됩니다. 러시아에서 유학중(현재는 교수)인 저자가 알라딘 블로그에 썼던 글들과 여러 다른 글들을 묶어서 편집한 책입니다. (로쟈의 저공비행 - http://blog.aladdin.co.kr/mramor)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문학 또는 인문학, 철학이란 영역에 대해서 너무 암 생각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닌가 라는 약간의 반성과, 대학생일 때 이후로 이런 근본적인 의문이나 물음에 대한 고민조차 없이 생활에 쫒겨온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들이지요. 물론, 생활과 생존만큼 급하고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좀더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할애할 만큼의 가치는 분명 있는 것일텐데..

읽기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해석이 안되는 내용도 많았고, 문장자체에 쓰여진 어구나 문구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고, 저자가 언급하는 문장 자체에 대해서도 어려움을 느낄 만큼.. 어찌 보면 그만큼 너무 쉽고, 이해하기 좋은 텍스트들만을 읽어온 것은 아닌지.. (물론, 어렵게 쓰여진 문장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며, 쉬운 글로만 모든 내용을 전달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측면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 처럼,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글들만을 취한다면 역시나 따 그 수준의 이해와 성장이 될테니깐 말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가 다루는 소재들이, 그마나 독자들에게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영화나 소설 등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 많아서, 그나마 일부 재미있게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블로그를 통해서, 이와 같은 묵직한 글들이 대중에게 퍼블리싱 될 수 있다는 점은, IT가 가져온 효과라면 효과일테고, 이번 기회를 통해 좀더 진지한 생각과 글들을 접해봐야겠다는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이 조그만 성과라면 성과겠습니다. 특히, 저자의 글들 가운데 번역과 관련된 글들이나, 지젝, 벤야민, 레닌과 관련된 글들을 인상깊더군요. 한번쯤 읽어봐야 겠습니다.

읽고나서 언젠가는 이 책도 그리고 저자의 블로그도 한번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물론 클래식이 불어넣어주는 삶의 희망이 단지 '생존'만을 의미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으며 고전에서 배워야 하는 삶은 당당한 삶이고 기품있는 삶이다. 삶의 기품은 부유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시 라틴어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프롤레스)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한다. 즉 '클라시쿠스'가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밖에 내놓을게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한국어의 말장난을 갖다 쓰자면 '클라시쿠스'는 '맨션 계급'이고 '프롤레타리우스'는 '맨손 계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클래식의 가치와 효용이 이 두 계급에 모두 가 닿는다는 점이다. 즉 클래식은 '고귀한 자'도 읽어야 하고 '나약한 자'도 읽어야 한다.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함대'를 기부할 정도가 못 되는  '고귀한 자'는 '고귀한 척하는 자'일 따름이고, 형편 때문에 고전을 읽을 여유가 없다고 말하는 '나약한 자'는 '나약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자'다. 이제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차례다. (2009) (29쪽)

나는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는 하지만 신뢰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행복한 사람은 삶을 '의식'하지 않는다. 즉 당신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 '의식'은 언제나 병과 죽음으로 우리를 이끌며, 행복을 잠식하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구를 빌리자면, "의식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네." 좀 현학적으로 말하자면, 행복은 의식의 대상으로서 현전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대되거나 회고될 뿐이다. (40쪽)

그렇다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두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 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 마냥).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것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126~128쪽)

인생은 여행길이고 나그네길이고 소풍길이란 얘기들은 하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의 이면이 '기적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피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한쪽에 '기적으로서의 삶 Life as a Miracle'이 있다면 다른 한쪽엔 '여행으로서의 삶 Life as a Tour'이 있다. 누가 여행을 하는가?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고 연출하기가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기적과 남들의 기적을 '구경'하러 다닌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남들의 기적이 자신에게 옮기를 바라는 듯이. 그들은 자기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 miracle-maker'라는 걸 알지 못하거나 부인하는건 아닐까? (149~150쪽)

엄마들은 종종 자신이 어떤 '괴물'을 낳아놓은 것인지 알지 못하며, 창조주는 대체 자신이 어떤 세상을 창조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전하지만, 그는 한쪽 눈을 감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177쪽)

자연은 잔인하기보다는 단지 무자비하고 냉담할 뿐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내용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선의도 악의도 없고, 잔인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으며, 단지 냉담할 뿐인 어떤 사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사람의 뇌 속에는 목적이 가득 들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는 그것을 만든 동기나 이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목적에 대한 강박관념이 병적인 상태로 발전하면 그것을 편집증이라 부른다. 즉 실제로는 우연한 불운일 뿐인데도 그 속에 어떤 악의가 있지 않나 하고 의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R.도킨스 [에덴 밖의 강] (199~200쪽)

진정한 레닌주의자와 정치적 보수주의자간의 공통점은 이들이 자유주의적 좌파의 '무책임성'을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확고한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레닌주의자는 행동을 취하고 아무리 못마땅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과정에 뒤따르는 모든 책임을 떠맡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315쪽)

모호한/난해한 아카데미 담론과 대중문화를 접속시켜줌으로써 지젝은 무슨 일을 하는가? 바로 아카데미 바깥의 대중들이 자신의 생활 주변과 자신이 향유하는 문화 속에서 철학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 그리고 사실 이러한 역할은 백인의 컨트리 뮤직과 흑인의 리듬앤블루스를 결합시킨 록음악의 정신에 얼추 부합하지 않은가? 지젝과 '지젝 현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은 어느 영화감독의 말대로, 지젝은 "반지성주의의 시대에 지성주의란 게 얼마나 재미있고 뻑적지근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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