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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종이책

[서평] 통섭(Consilience) - 에드워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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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통섭(Consilience)
저자 - 에드워드 윌슨

출판 - 사이언스 북스
분량 - 558
ISBN- 978898371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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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둔 지가 꽤나 되었습니다만, 어렵사리 이번 기회에 잡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아마도 근래에 읽었던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어려웠지 않나 싶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분명 한계가 있었고, 진도를 빼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만, 쭈욱 읽어야겠다는 일종의 강박과 의무 덕분에 다 읽어내기는 했습니다만, 이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쓴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다 싶습니다.

'통섭(Consilience)'이란 단어 자체도 낯설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우며 - 발음기호를 찾지도 못했지요.. 아마, 인문학과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집중도 잘 안되더군요. 외국 서적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매우 광범위한 내용을 다루다 보니 중구난방으로 집중이 안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게 원래 그런건지, 번역 때문에 그런건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다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된 주제는 결국.. 현실 세계를 바라봄에 있어서, 이런 저런 학문적 분류와 구분지어진 각종 영역들을 통합하거나 엮어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즉, 각종 학문의 분류와 구분은 인간이 세상을 이런 측면에서 또는 저런 측면에서 해석하고 바라보면서 생겨진 것이고 - 물론, 그래야만 적절한 해석과 이해가 가능하기도 했었겠지요. - 세상 자체가 그렇게 구분되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온전히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관점에서 파악된 것들이 적절히 통합되고 연결되어야 보다 높은 수준에서 또는 아직 우리가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체계화된 도구로서 인문학, 예술, 자연과학, 사회과학이라는 구분이 존재하는 것이지, 실세계 자체가 위와 같이 구분지어져 있지는 않지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각 부위별로, 각 영역별로 전개된 각기 다양한 지식들을 이용해서 실세계를 이해하고 한다면,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 다리를 만진 사람, 귀를 만진 사람이 확보한 지식과 경험을 통합하여야 온전히 코끼리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수학이라는 관점에서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숫자는 단지 자연수일 뿐입니다. 유리수던 무리수던 허수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현상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사과 반쪽짜리는 존재 자체로 사과 반쪽 1개일 뿐, 사과 1/2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과와 비교해서 1/2이라는 해석을 가한 것 뿐이지요.

인류가 여태까지 세상을 해석하고, 정리해온 체계들은 그것이 인문학이던, 자연과학이던, 철학이던 간에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세상들에 대해서 좀더 합리적으로 또 정확하게 예측하고, 해석하고자 할 때에는 확보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여러가지 형태로 재구성하고, 연결하고,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서 보다 정확하고 가치있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Consilience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뜻한다. 이것은 옛날 어느 교수가 과학과 그 방법론에 관하여 가졌던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과학을 이용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단위들로 쪼개는 데 여념이 없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이 같은 관점을 잃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래야 모든 과학이 개념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기는 하지만 와인에는 더할 수 없이 어울리는 말이며 우리 네 사람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단어다. 와인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통일을 의미하며 와인을 만드는 사람은 이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14쪽)

위대한 천체물리학자인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드는 그의 스승이었던 아서 에딩턴경의 정신을 기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양이 우리 날개의 밀랍을 녹이기 전에 우리가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알아보자." (38쪽)

최대한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은 세상에 대한 지식을 모아서 그 지식을 시험 가능한 법칙과 원리로 응축하는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탐구이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첫째 기준은 반복 가능성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수행해도 같은 현상이 나와야 하고 그런 현상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분석과 실험을 통해 입증되거나 반증되어야 한다. 둘째 기준은 경제성이다. 과학자들은 가장 많은 정보를 가장 적은 노력으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정보를 추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을 우아함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기준은 측정이다. 만일 어떤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척도에 따라 적절히 측정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일반화는 명확해진다. 넷째 기준은 발견 기법이다. 최고의 과학은 종종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후속 발견들을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은 원래 원칙의 진위를 다시 시험해 보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는 다섯째 기준은 통섭이다. 즉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서로 연결하고 일치시킬 수 있을 때 가장 경쟁력있는 설명이 된다. (112-113쪽)

렇다면 과학자들의 동기는 어떨까? 돈을 챙기려는 장사치에서 고매한 인격자까지 각양각색이다. 아인슈타인은 1918년에 막스 플랑크의 60회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과학자들을 기막히게 잘 분류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과학의 사원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우월한 지적 능력을 즐기기 위해 과학을 한다. 그들에게 연구는 개인의 야망을 충족시켜 ㅈ는 일종의 스포츠이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순전희 공리주의적인 목표 때문에 과학에 종사한다. 그러나 세번째 부류가 있다. 만일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이 두 부류에 속하는 모든 이들을 과학의 사원에서 쫓아낸다고 하더라고 플랑크를 포함한 소수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119쪽)

한때 개념 형성의 복잡성 문제에 천착하기도 했던 노벨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에 따르면 "창조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뚜렷이 구분짓는 특성은 (1) 창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모호하게 정의된 문제 진술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점진적으로 구조화하며, (2) 상당한 기간 동안을 그 문제들에 천착하고,(3) 그 문제들과 관련되거나 잠재적으로 관련된 분애들에 관한 배경 지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130쪽)

우리가 의미(meaning)라고 부르는 것은 심상(imagery)을 확장하고 감정을 개입시키며 확산되는 흥분을 통해서 창조된 신경망들 간의 연관이다. 그렇다면 의사결정(decision making)은 시나리오들 간의 경쟁적 선택을 지칭할 것이다. 승리한 시나리오는 그에 따른 감정의 종류와 강도를 결정한다. 감정의 일정 형태와 강도가 바로 기분(mood)이다. 창조성(creativity)은 새로운 시나리오들을 생산하고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을 고르는 뇌의 능력이며 현실성과 생존 가치를 결여한 시나리오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망상(insanity)이다. (213쪽)

문화는 공동의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때 개별 마음은 유전적으로 조성된 인간 두뇌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유동적이다. 얼마나 그런지는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연결은 편향되어 있다. 즉 유전자는 인지 발달의 신경 회로와 규칙적인 후성 규칙(epigenetic rules)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마음은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한다. 물론 자기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개체의 두뇌를 통해 유전된 후성 규칙들의 안내를 받아 이뤄진다. (232쪽)

유전자 속박의 본성과 문화의 역할은 이제 다음과 같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어떤 문화 규범은 경합하는 다른 규범들보다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한다. 이 때문에 문화는 유전적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하지만 그 속도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빠르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연결은 더 느슨해진다. 하지만 그런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법은 없다. 문화는 정확한 유전적 처방 없이 고안되고 전달되는 정교한 적응들을 통해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233쪽)

이런 목표를 위해 과학자들은 이론, 특히 수학적 모형이 지녀야할 네 가지 덕목을 추구한다. 첫째는 검약성(parsimony)이다. 즉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단위와 과정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좋은 이론이라는 기준이다. (중략) 두번째 덕목은 일반성(generality)이다. 즉 모형으로 포괄되는 현상의 범위가 넓으면 넓을수록 그 모형이 참일 개연성이 더 높다는 기준이다. (중략) 그 다음은 통섭(consilience)이다. 다른 분야에서 탄탄하게 검증된 지식에 순응하는 어떤 분야의 단위와 과정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그렇지 않는 경우보다 일관성의 측면에서 더 우월하다고  입증되었다. (중략) 이제 마지막 덕목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예측성(predictiveness)으로서 이미 다른 덕목들로부터 유도된 덕목이다. 많은 현상에 대해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을 관찰과 실험을 통해 검증하기 쉬우면 그 이론은 좋은 이론이 된다. (344쪽)

과학이 인간의 행동에 관해 언급할 때 얼기설기 뭉뚱그려 말하는 데 비해 예술은 반대로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말한다. 다시 말해 과학은 원리를 창출한 다음 그것을 사용해 인간이라는 생물 종 특유의 속성을 정의하지만, 예술은 그 속성을 섬세하게 구체화하고 인상적인 방식으로 명시한다. 항구적인 것으로 증명된 예술 작품들은 하나같이 강한 인본주의적 냄새를 풍긴다. 개인의 상상력 속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인간의 진화가 부여한 보편적인 것을 건드린다. 판타지의 세계를 상상할 때조차 예술 작품들은 인간성의 기원에 그 닻을 내린다. 판타지의 거장인 커트 보니것 주니어가 지적했듯이 예술은 우리가 거기에 속해 있든 아니든 간에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둔다. (378쪽)

그렇다면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현상들 - 예컨대, 별의 탄생에서 사회 조직의 작동에 이르기까지 - 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공통 유래를 통해 모든 다른 생명들과 친척 관계에 있다는 생물학적 결론은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모든 생명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DNA 유전 암호를 공유하는 데 이 암호는 RNA로 전사되고 결국 동일한 아미노산을 지닌 단백질로 번역된다. 계통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구대륙 원숭이와 유인원 사이에 위치한다. 회석 기록은 인간의 직접적인 조상이 호모 에르가스테르나 호모 에렉투스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인류가 20만 년 전 쯤에 아프리카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몇십만 년 동안 진화해 온 우르이 유전적 인간 본성은 문화의 진화에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460쪽)

정말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이런 지루함과 패배감을 겪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고도 소중한 경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